아름다운글

등에 부침- 장석주

우주회장 2010. 7. 25. 15:23

등에 부침

 

장 석 주

 

 

1

누이여, 오늘은 왼종일 바람이 불고

사람이 그리운 나는 짐승처럼 사납게 울고 싶었다.

벌써 빈 마당엔 낙엽이 쌓이고

빗발들은 가랑잎 위를 건너뛰어 다니고

나는 머리칼이 젖은 채

밤 늦게까지 편지를 썼다.

자정 지나 빗발은 흰 눈송이로 변하여

나방이처럼 소리없는 아우성으로

유리창에 와 흰 이마를 부딪치곤 했다.

나는 편지를 마저 쓰지 못하고

책상 위에 엎드려 혼자 울었다.

 

2

눈물 글썽이는 누이여

쓸쓸한 저녁이면 등을 켜자.

저 고운 불의 모세관 일제히 터져

차고 매끄러운 유리의 내벽에

밝고 선명하게  번져나가는 선혈의 빛.

바람 비껴불 때마다

흔들리던 숲도 눈보라 속에 지워져 가고,

조용히 등의 심지를 돋우면

밤의 깊은 어둠 한 곳을 하얗게 밝히며

홀로 근심없이 타오르는 신뢰의 하얀 불꽃.

등이 하나의 우주를 밝히고 있을때

어둠은 또 하나의 우주를 덮고 있다.

슬퍼 말아라, 나의 누이여

많은 소유는 근심을 더하고

늘 배부른 자는 남의 아픔을 모르는 법,

어디 있는가, 가난한 나의 누이여

등은 헐벗고 굶주린 자의 자유

등 밑에서 신뢰는 따뜻하고 마음은 넉넉한 법,

돌아와 쓸쓸한 저녁이면 등을 켜자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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